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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 이야기

오늘도 네잎클로버 2020. 1. 31. 09:15

학자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선교사로 헌신하다.

30세 때인 1905년 가을, 슈바이처는 조만간 대학 교수직을 포기하고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겠다는 결심을 주위에 알렸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깜짝 놀란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지만, 슈바이처는 이 결정이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1898년에 귄스바흐에서 있었던 개인적 결단 이래로 충분히 심사숙고한 결과라며 차분하게 사람들을 설득했다. 처음에는 국내에서 빈민 및 수감자 사역을 생각했지만, 1904년에 우연히 본 어느 잡지 기사에서 파리 선교회의 아프리카 사역에 관해 알고 그쪽으로 관심을 돌린 것이었다. 기왕 선교사가 되려면 의사 자격을 따는 편이 더 유리하겠다고 슈바이처는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선교지에서 의료 활동을 병행해서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신학자 출신 선교사’를 바라보는 일각의 의구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해외 선교 부문은 보수주의 교단의 독무대였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로 분류되는 슈바이처로선 충분히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파리 선교회 내부에서는 슈바이처를 선교사로 파송하는 문제를 놓고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

 

 

슈바이처는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의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의대 교수들은 동료인 슈바이처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어 주었지만, 교수와 학생으로 두 사람 몫의 공부를 나란히 감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른이 넘은 사람의 기억력이 이십대 학생들의 기억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슈바이처는 6년 만인 1911년 말에 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결혼했는데, 부인 역시 남편의 선교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 간호사 공부를 해서 면허를 따냈다. 이때까지도 파리 선교회에서는 슈바이처를 선교사로 받아들일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거듭되었다. 신앙 검증을 해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온 끝에, 결국 슈바이처는 선교지에서 설교와 신학 관련 발언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파송될 수 있었다. 신학자이자 목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함구령이야말로 이만저만한 굴욕이 아닐 수 없었지만, 슈바이처는 이런 푸대접을 감수하며 기꺼이 자비 의료 선교사로 자원했다. 그의 목적지는 가봉(당시 명칭은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의 오고웨 강변에 있는 랑바레네 마을이었다.

 

랑바레네의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슈바이처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슈바이처 부부는 프랑스 식민지에 머물던 다른 독일인들과 함께 적국인으로 몰려 억류당했다.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은 문화의 몰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 슈바이처는 문화 철학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구상하여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생명에 대한 외경’이라는 개념을 처음 떠올린 것도 이 즈음이었다. 즉 인간이란 “살려고 하는 생명, 또한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라는 인식을 근거로 삼아, 새로운 실천 윤리학을 창안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1917년 9월, 슈바이처 부부는 프랑스로 송환되어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이듬해에 스위스를 거쳐 고향 알자스로 송환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알자스가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되자 슈바이처는 1919년에 아예 국적을 프랑스로 바꾸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활동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유럽에 머물면서 슈바이처는 강연과 연주회를 통해 선교 비용을 모금했고, 회고록인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1921)와 문화철학 저서인 [문화의 몰락과 재건](1923)과 [문화와 윤리](1923)를 간행했다. 유럽에 온 지 6년 만인 1924년에 슈바이처는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병원 업무에 필수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부인은 건강 악화로 고향에 남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사와 간호사 등이 동행했다. 슈바이처는 각고 끝에 병원을 재건하고 3년 반 뒤인 1927년에 유럽에 돌아왔다. 슈바이처는 1913년부터 1965년까지 52년 동안 13차례에 걸쳐서 아프리카에 체재했는데, 그 기간만 햇수로 따지면 37년쯤 된다.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유럽 각지에서 강연 및 모금 활동에 힘썼고, 자서전 [나의 인생과 사상](1931)을 비롯한 출판 수입도 모두 선교 사업에 들어갔다. 1939년부터 시작된 제7차 체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48년까지 계속되었다. 말년의 슈바이처는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으며 유명해졌고, 195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핵무기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대외 활동에도 열심이었지만, 그의 주된 활동 무대는 여전히 랑바레네였다. 1957년에 부인이 사망하자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 머물며 다시는 유럽 땅을 밟지 않았다. 그리고 1965년 9월 4일에 90세를 일기로 랑바레네에서 사망해서 오고웨 강변의 무덤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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